글로 담는 나의 하루

어른_250311

레이2023 2025. 3. 11. 19: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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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동안 한 번이라도 썼어? 아니야? 그럼 버려.”
때마다 돌아오는 냉혈한 버림주의자에게 ‘수집’이란 비효율적 삶의 방식의 표본 혹은 공간 낭비 정도가 딱 알맞았다. 어차피 물건은 차고 넘치고 추억은 다시 만들면 되니까.
하지만 그녀의 엄마는 달랐다. 이 바지는 비싸게 주고 샀으니까, 저 상자는 소중한 선물을 품었던 상자였으니까, 이 메모는 글씨가 정말 예쁘게 써졌으니까, 저 이불은 아이들이 쓰던 거니까….
버리지 않을, 아니 버리면 안 될 이유만 만들던 그녀의 서랍은 발길이 끊긴 듯 텅 빈 골목의 잡화점처럼 짙은 세월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들에게 청소는 전쟁과도 같았다. 버리자는 공격과 그것을 막으려는 방어가 난무하는 소리 없는 전쟁. 이 소란 속에서도 그녀는 그것들이 품고 있는 옛 기억을 남몰래 그리워했다. 그 어떤 추억도 그때와는 같을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에. 오가는 사람, 켜켜이 쌓이는 시간, 그리고 그때의 우리. 이 속에서 변치 않는 건 그냥 그 물건일 뿐이라는 걸, 엄마라는 이름의 한 어른은 뼈저리게 이해하고 있었다.

내게 어른이 되었다고 느끼는 순간이 언제냐 묻는다면, 다시 오지 않을 추억을 수집하는 지금이라고 말하고 싶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샀던 옷이니까, 엄마의 은퇴 선물을 담았던 상자였으니까, 고기 좋아하는 딸내미 해준다고 손수 적은 엄마 레시피니까, 엄마가 쓰던 베개니까….
같이 그리워할 수 있었던 순간들을 다 보내준 후에야 나 홀로 그리워하며 어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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